시승기

[스페셜]전설적인 밀레밀리아에 출전하다

모터 트렌드 입력 2017.08.11 17:19 수정 2017.08.11 17: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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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레이스 경주 밀레밀리아에 참가했다. 레이서로서 가슴 벅차며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밀레밀리아(Mille Miglia). 부드럽고 로맨틱하게 발음되는 이 단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험난한 이탈리아의 내구레이스다. 언젠가 레이싱 드라이버로서 어려운 도전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모터 트렌드> 이진우 에디터가 밀레밀리아 경주의 일화를 들려줘 용기를 낸 적이 있다. 바로 1955년 밀레밀리아 우승을 차지한 스털링 모스와 데니스 젠킨슨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 내린 결정으로 작년에 독일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레이스까지 출전하게 됐다. 그리고 우연치 않은 기회가 생겼다. 자동차 다큐멘터리 출연을 위해 밀레밀리아 레이스 현장인 이탈리아 브레시아로 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뉘르부르그링 내구레이스를 일주일 앞둔 상황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물론 경주 참가자가 아닌 미디어로서 동행이지만, 지독하게 험난한 1600킬로미터 장거리 코스를 달렸던 과거 영웅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영광이었다. 과거의 밀레밀리아는 말 그대로 1000마일(1600킬로미터)을 누가 빨리 주파하는가를 가르는 죽음의 레이스였다. 경주가 펼쳐지는 무대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일반도로다. 도로 주변에 펜스나 버지(verge) 같은 배려는 없었다. 당시 레이스카는 안전벨트조차 없었고 바람을 막아줄 고글과 두건, 얇은 하프페이스 헬멧에 의지하고 거친 아스팔트를 시속 280킬로미터로 질주해야했다.



요즘의 밀레밀리아는 가장 빠른 레이서를 가리는 경주가 아니다. 과거 밀레밀리아가 열렸던 1957년까지만 생산한 모델로 참가할 수 있는 클래식카 클럽 이벤트다. 그럼에도 여전히 1600킬로미터의 장거리를 3박 4일간 기술적 문제 없이 달려내야 한다. 참가비도 약1000만원으로 비싸다. 돈을 낸다고 다 참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참가 신청 후에 주최 측의 선정을 거쳐야 한다. 선정 기준은 명확히 공개되지 않지만, 과거 밀레밀리아에 참가했던 이력이 있거나 참가 차종과 기술적으로 유사한 컨디션을 유지한 차일수록 선정 가능성이 높다. 원형과 다르게 복원한 모델로는 참가가 어렵다. 밀레밀리아의 순수 혈통을 지키려는 주최 측의 고집이 투영된 결과다.

경주 방식도 스피드 경쟁이 아니라 구간 별로 설정한 주행 권장 시간을 오차 없이 잘 맞추는 팀이 승리하는 형태다. 구간 평균속도는 대략 시속 50킬로미터 정도다. 일반차들과 함께 달리는 공도에서 과속으로 인한 사고 위험을 줄이고, 최소 60년 이상 나이가 든 클래식카들에게 부담도 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스피드를 낼 수 있는 페이스다.

경기 시작 전날, 자동차 기술 검차가 이뤄지는 브레시아 빅토리아 광장 주변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밀레밀리아 주인공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배기가스와 소음 규제로 부터 자유로웠던 내구레이스 대선배들이 제각각 우렁찬 배기음을 뽐내면 작은 도시가 들썩거린다. 처음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다양한 자동차들의 디자인에 매료된다. 약 450대가 출전했는데 엔트리 번호가 낮을수록 연식이 더 오래된 차다. 1번을 단 차는 1923년형 벤틀리 3리터 모델이다. 실제 밀레밀리아에 출전한 경력을 지닌 일부 차는 당시 엔트리 넘버를 지우지 않고 달고 있다. 이탈리아 건축물과 카페 앞에 아무렇지 않게 주차해둔 수많은 클래식카들의 광경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우면서 낯설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매뉴팩처러, 카로체리아들의 작품에 넋이 나가 연신 카메라를 들이댔다.



참가자들이 2인 1조로 참가한다. 아버지와 아들, 오랜 친구, 언니와 여동생, 부부에 이르기까지 1년간 이 대회를 위해 차를 준비해온 이들의 기다림과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버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의 초점은 자동차에서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로 옮겨갔다. 하나같이 미소가 떠나지 않는 표정의 다양한지에게서 물려받은 자동차로 참가하거나, 어릴 적 밀레밀리아 레이스를 보고 자라 마침내 클래식 레이스카를 구입한 사연, 10년 넘게 차를 복원한 동네 아저씨까지 각자의 출전 동기도 다양하다.

현대적 의미의 모터스포츠는 아니지만, 1920~50년대 자동차를 사흘 동안 운전해야 하는 건 여전히 똑같다. 파워스티어링도 없고, 브레이크 페달은 무거운 데다 딱딱한 승차감속에서 비와 햇볕에 노출되어 밤낮으로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간간이 보이는 여성 참가자들은 갤러리들의 존경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새벽에 출발해 늦은 밤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달리는 여정에 지칠 법도 한데, 언제든 차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면 다들 화색이 돈다. 그리고 차를 보러 온 갤러리들과 기꺼이 자동차를 공유한다. “차에 한번 앉아봐도 되겠냐”고 조심스레 묻는 내게 “한번 운전해보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었다. 자신들의 작품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는 ‘선한 상호작용’의 연속인 셈이다.



밀레밀리아 행사 기간에는 경찰이 밀레밀리아 참가 자동차에 통행 우선권을 준다. 막히는 구간은 일반차들이 좌우로 붙어 도로 중앙에 공간을 만들어 클래식카들을 먼저 보내거나 신호에 관계없이 먼저 통행을 허용해주기도 한다. 불만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밀레밀리아 대회에 대한 존경이면서 저속 주행 시 냉각에 취약한 클래식카들에 대한 국민적 이해였다.

로마에서 출발해 파르마로 향하던 여정의 셋째 날이 마무리될 무렵,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1600킬로미터의 여정 동안 수십 개의 작은 도시를 통과하는데, 모든 도시에서 엄청난 인파가 코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에 손을 흔들어줬다. 바퀴 위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움직이는 박물관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부터 경주차보다 나이 많은 노인까지 지나가는 차 하나하나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파가 서 있는 거리만 합해도 족히 100킬로미터는 넘었을 터. 수백 대의 클래식카와 존경스러운 참가자들보다 이 행사를 흠뻑 즐기는 관중들이 바로 밀레밀리아의 주인공이었다.



백색 바탕 위에 빨간 글씨가 있는 밀레밀리아 로고는 끝에 화살표가 달려 있는데, 이는 실제 주행 코스상 갈림길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이정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어느덧 경주가 시작됐던 브레시아에 다다르게 된다. 4일의 여정 동안 망가지거나 사고를 당한 경주차도 보이고, 참가자들은 검게 피부가 그을거나 배기관에 화상을 입고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순위와 관계없이 완주만으로도 숭고한 추억이 된다. 21세기에 이어지는 20세기의 내구레이스. 그렇게 사흘간 30시간 넘는 주행이 끝나자 비로소 피로감이 몰려온다. 잠깐, 그런데 스털링 모스가 이 코스를 단 10시간 만에 주파했다고? 말도 안돼!

글_강병휘(자동차 칼럼니스트)

에디터_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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