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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차]새나라자동차 새나라

조회수 2019. 1. 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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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자동차 역사의 시발점(始發點)이 된 국제차량제작의 ‘시-발’은 비록 그 기술적 완성도나 정교함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을 일으키는 데 있어 혁혁하게 기여한 바 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제 3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부는 ‘국가재건 방안’ 중 하나로 내놓은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을 제정 및 공표했다. 이는 외산 자동차 및 부품의 수입을 제한하고 국산화율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새로운 정권은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군사 정권의 중앙정보부 주도로 자동차 기업이 하나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자동차 기업이 바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이하 새나라자동차)’였다. 새나라자동차는 일본의 닛산자동차와 손을 잡고 닛산자동차의 소형 승용차 모델인 블루버드를 라이센스 생산하기 시작했다. 공장은 과거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에 이스즈자동차가 인천 부평에 설립한 국산자동차 공장을 인수하여 세워졌다. 차명은 기업의 이름 그대로 ‘새나라’로 불렸다.


화려하게 등장한 새나라 양장 미인, 그러나...

새나라자동차는 명목 상, 닛산자동차의 초대 블루버드(Bluebird)를 반조립(Semi-Knock-Down) 방식으로 라이센스 생산한 자동차였다. 새나라자동차는 당시 우리보다 자동차 선진국으로 한참 앞서 나가고 있었던 일본의 승용차를 그대로 들여 온 모델에 가까웠기에, 품질이나 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국제차량제작의 시-발 자동차와는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블루버드의 세련된 디자인과 품질과 차원이 다른 완성도로 인해 새나라 자동차는 뛰어난 경쟁력을 바탕으로 시-발 자동차를 앞서 나갔다. 새나라의 블루버드는 시발자동차에 비해 한층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으로 자동차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이 당시 새나라 블루버드는 ‘새나라 양장 미인’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면서 시발자동차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는 차의 생산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처음부터 그 설립과 운영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고 이것이 정치적인 의혹으로 번진 데다, 국내의 외환 사정이 나빠지면서 사업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주도로 세워진 새나라자동차는 군사 정권이 제정한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과는 정반대로 운영되었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에서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은 새나라자동차에 한해서는 완전히 반대로 적용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재일교포 박노정에게 일본 닛산 자동차를 반제품으로 수입 및 조립생산하는 것을 허가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해외 자본의 국내 투자’라는 명목이었다.


게다가 새나라자동차는 이미 공장을 세우기도 전에 완제품 상태인 400여대의 블루버드를 국내에 수입하여 판매하였다. 이렇게 판매된 블루버드 중 150대는 외국인 관광객용, 250대는 일반 관광용으로 면세 혜택을 받고 통관되었으나, 1962년 5월, 국내에서 열린 아시아 영화제를 빌미로 몽땅 일반택시로 전환되었다. 게다가 후일 드러난 바에 따르면, 새나라자동차는 자체적인 생산은 커녕, 아예 일본에서 완성된 완성차 2천대를 이와 같은 특혜를 통해 수입하여 어마어마한 마진을 붙여 시중에 판매하여 이익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획득한 자금이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였다고 알려졌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당시 군사 정권은 새나라자동차를 정치자금 조달의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새나라자동차는 증권 파동, 워커힐 호텔 신축, 파칭코 부정 도입 등과 함께 이른 바 제3공화국의 ‘4대 의혹’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그리고 새나라자동차의 등장은 시-발 자동차를 통해 독자적 발전 과정의 걸음마를 떼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을 뿌리 채 흔들리게 만들었고, 결국 국제차량제작은 새나라자동차와 같은 해 도산하고 만다.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 11월부터 1963년 5월이라는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2,700대가 판매되었다. 새나라자동차의 부평 공장은 이후 신진자동차가 사들였고, 훗날 한국지엠의 전신이 되었다. 하지만 새나라자동차 사건으로 인해 독자적으로 자생하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 기반은 이미 무너져버렸고, 향후 약 20년 넘게 외국계 자동차 기업에 의존해야 하는 산업 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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