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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차]국제차량제작 시-발

조회수 2018. 12. 2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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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은 현재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 중 하나이며, 한국의 현대자동차그룹 또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자동차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들이 주축이 되는 국내 자동차 산업은 조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를 책임지는 제조업의 중추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은 6.25 전쟁의 화마가 물러간 이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이 시절 국내 자동차 산업의 시작은 극히 미약했다. 하지만 그 미약한 시작은 지금의 세계적인 자동차 산업 규모를 이룩하는 데 시금석이 되어 주었다. 이번 특별했던 차 시리즈는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첫 페이지를 써 내려간 이들, ‘국제차량제작’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시발점

1950년대 당시, 대한민국은 전후 회복을 위해 국토를 재정비하고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는 산업박람회에서 자체제작 자동차가 출현하는 일이 일어났다. 바로 ‘국제차량제작(國際車輛製作)’이라는 자동차 제작 회사가 내놓은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상 첫 차, ‘시발’이 등장한 것이다. 국제차량제작의 시발(始發)은 ‘첫 출발’, 혹은 ‘어떠한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첫 출발을 기록한 자동차에게 그 어떤 것 보다도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국제차량제작은 본래 광복 후 미군으로부터 불하(拂下)받은 군용 차량의 정비와 폐차 처리 등을 업으로 삼았던 ‘국제공업사’를 모체로 하는 기업이었다. 설립자인 최무성은 이 국제공업사를 얻은 경험을 통해 직접 자동차를 제작하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그 첫 결과물이 바로 시발이다.


이들의 제작 방식은 현대적인 자동차 산업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전쟁 이래 미군이 불하하거나 남기고 간 군용 지프들의 부품을 수집하여 그 중 상태가 양호한 것을 골라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필리핀의 대중적인 교통 수단인 지프니(Jeepney)의 제작과정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 버려진 지프의 프레임 섀시와 엔진, 차축 바퀴 등 각종 부품을 떼어다 만드는 재생차량이라는 맥락에서는 거의 동일한 형태의 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발의 경우, 차체의 외형만큼은 기존 지프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도록 하면서도 새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철판을 가공하여 외장(Body)을 따로 제작했다. 이 차체 외장은 익히 알려진 대로, 석유 저장에 사용되는 드럼통을 자르고 펴서 만들어졌다. 이 드럼통을 펴는 작업은 처음에는 일일이 손으로 했지만, 손으로 하기에는 너무나 고된 데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간혹 손으로 펴기 힘들어서 트럭이 지나다니는 길에 내놓아 납작하게 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발은 당시에는 그럴듯해 보이기는 했지만 기술적으로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영운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미 만들어졌다가 버려진 자동차의 부품을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차체 외장 또한 현대적인 생산 방식이 아닌, 드럼통을 자르고 펴서 붙이는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발은 자체 제작한 엔진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기존 지프에 사용된 엔진을 역설계(리버스 엔지니어링)하여 주물로 조악하게 복제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원본 엔진보다는 신뢰성 면에서 떨어졌고 품질도 조악할 수 밖에 없었다. 시발의 심장은 미군용 지프에 사용된 1.3리터(1,323cc) 4기통 엔진이 원형으로, 최고 80km/h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국제차량제작 시발은 국내 자동차 산업 역사의 첫 페이지를 썼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1955년 8월에 처음 출시한 시발은 동년 10월의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통해 인지도가 크게 오른다. 특히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이 차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소득 수준이 높은 상류층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 덕분에 시발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상당한 숫자의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시발의 가격은 8만환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쌀 90가마니 정도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이후 택시회사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가격이 계속 오르기 시작해 택시로 판매될 당시에는 30만환에 이르고 이후에는 90만환까지 치솟게 된다.


하지만 국제차량제작의 역량으로는 이렇게 밀려 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원시적인 생산 방식으로 인해 하나의 차를 완성하는 데 4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문한 고객과 약속한 차량 인도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장기간의 대기에 지친 고객들의 항의 방문이 이어지기도 했다. 수요는 많은데 생산이 지연되면서 물량이 부족했던 탓에 프리미엄까지 붙여서 판매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생산성에 대한 문제는 이후 시발의 수주를 받으며 확보한 선수금을 이용하여 새 공장을 확보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 이 당시 국제차량제작이 받은 선수금은 총 1억환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시발은 택시운수회사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국내의 도로 사정 상, 4륜구동 지프 형태의 시발은 택시로서 매력적인 차종이었다. 시발은 택시회사들에 500여대가 판매되었으며, 이 덕분에 본래의 이름은 ‘시-발’보다는 ‘시발 택시’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계기가 되었다. 1957년, 이승만이 자동차 숫자를 제한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나날이 오르는 인기에 힘입어, 국제차량제작은 1960년대 초부터는 연 생산량을 약 3천대 규모로 세우고, 세단형 모델과 버스 모들을 개발하기도 하는 등, 더욱 야심차게 자동차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승승장구를 이어나가고 있던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시발은 5.16 쿠데타 이래 제 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당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자가용 자동차를 사치품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국제차량제작이 새로 개발한 세단형 시발은 미국제 세단 승용차와 같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여, 당시 군부정권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자동차 기업에 있어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이다. 그 강력한 경쟁자는   당시 제 3공화국의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여 세운 ‘새나라자동차’였다.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소형 승용차, 블루버드(Bluebird)를 수입하여 국내 시장에 출시하였다. 새나라의 블루버드는 시발자동차에 비해 한층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으로 자동차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이 당시 새나라 블루버드는 ‘새나라 양장 미인’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면서 시발자동차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의 첫 페이지를 연 국제차량제작의 시-발. 하지만 현재, 생산한 당시의 원본 차량은 국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단지 극소수의 복원품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현재 알려져 있는 복원품은 삼성교통박물관과 광주 버스터미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그리고 제주도 세계자동차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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