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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대신한 더미(Dummy) 이야기

조회수 2018. 4. 21. 07: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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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개발에서 더미(Dummy)는 충돌 시험용 인체 모형을 말한다. 정면, 측면, 후방, 보행자, 어린이 등 다양한 충돌시험용 더미가 있다. 충돌시험 때 실내에서 탑승객은 물론 보행자의 상해 정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더미의 기원은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 공군에서 전투기의 긴급 탈출에 필요한 사출좌석을 개발하기 위해 지금과 모습을 한 더미가 등장했다. 이후 자동차에 쓰이기 시작했는데, 큰 손 GM은 충동 시험용으로 더미를 대량으로 사들여 충돌 안전성에 대한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더미가 등장하기 전 충돌 시험이 어땠을까? 연구개발에서 충돌시험의 비중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높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당시 사고 시 탑승객 또는 보행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발 단계에서 차를 많이 부숴버릴 수밖에 없다.

단순히 부시는 게 아니라 운전자와 탑승객에서 어떤 상해를 입히는지 철저히 분석해야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직접 타고 충돌시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일부 경미한 충돌시험은 사람이 직접 타는 무모한 짓도 있었다고 하지만 하나뿐인 생명을 충돌시험의 재물로 헌납할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없다.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뭔가(something new)가 필요했다. 이렇게 해부용 시체인 카데바(Cadavers)가 충돌시험을 위해 쓰이기 시작했다. 조건도 있었다. 피부에 생채기가 없는 비폭력으로 사망한 백인 남성이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카데바는 많지 않았을 터. 동일한 자료는 물론 일회성이라 자료의 신뢰성도 떨어졌다. 더구나 아동 카데바는 구하기도 힘들었다.

언론에서는 비윤리적인 시험이라 비난했다. 교통사고가 빈번하기 일어나기 시작했던 시점이라 충돌시험의 비중도 같이 높아졌다. 충돌시험을 만족하는 카데바를 구하는 일은 또 다른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제한적인 시험 결과는 나이 많은 백인 남성으로 편향되기에 이르렀다.

카데바를 대신해 동물을 이용한 충돌시험도 진행되었다. 오늘날의 동물단체가 이를 봤다면 천인공노할 일이겠지만, 카데바보다는 동물을 활용하는 편이 도덕적으로나 언론의 질타를 덜 받았다. 사람과 닮은 침팬지, 덩치 큰 곰, ‘가성비 높은’ 돼지 등이 충돌시험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중 돼지는 단연 인기였는데 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을뿐더러 돼지의 장기는 충돌 시 스티어링 휠로부터 받는 상해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반세기의 자동차용 충돌 더미 역사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모델명은 하이브리드 시리즈다. 70년대 초 등장해 3세대로 진화하면서 충돌 더미의 대명사로 군림하고 있다. 하이브리드의 탄생은 더미의 시조 시에라 샘과 최초의 충돌용 더미를 만든 VIP 시리즈의 이종교배로 신뢰성과 내구성을 확보한 더미였다.

80년대에는 하이브리드 I의 후속 모델인 하이브리드 II가 선보였다. 구형의 어깨, 척추, 무릎 관절의 반응을 개선했고 80년대 말에 막 보급되기 시작한 에어백 시험까지 가능한 사양을 뽐냈다. 90년대에 이르러 자동차의 성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안전 규제도 점점 강화되어 기존 하이브리드 시리즈의 단점을 대대적으로 보완할 더미가 필요했다.

90년대 말에 출시한 하이브리드 III은 충돌 시 탑승객의 상해를 세세히 감지할 수 있는 진일보한 더미였다. 머리부터 목, 가슴, 대퇴골, 무릎, 발까지 그동안 볼 수 없는 정교함을 자랑하며 운동범위를 확대했다.

차세대 더미 토르(Test device for Human Occupant Restraint)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거인을 죽인 천둥신으로 현존하는 최고 사양의 더미다. 하이브리드 III의 후계자인 토르는 인간과 유사한 척추와 골반을 갖고 있다. 얼굴에는 여러 가지 센서가 있어 기존 모델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었던 얼굴의 충격량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고 획기적인 장비 확장성을 꼽을 수 있다.

반세기 동안 진화한 더미는 나날이 엄격해지는 충돌 법규와 가혹한 조건에서 견딜 수 있도록 점점 더 사람과 가까운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부의 상해, 출혈량 표시는 물론 사람의 신경계 손상, 뇌의 상태까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더미로 발전하고 있다.

<자투리 상식> 더미 머리에 머리카락이 없는 이유?

더미와 흡사한 마네킹은 대부분 머리카락이 붙어있다. 패션용이기 때문에 헤어스타일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더미는 마네킹과 달리 한 톨의 머리카락도 없다. 대신 머리에는 충돌시험을 상징하는 충돌표시가 헤드폰처럼 그려져 있다. 이 충돌표시는 충돌 과정을 슬로모션으로 검토하기 위해 머리뿐만 아니라 무릎 등에도 있다. 최근 나오는 더미는 머리부터 발목까지 최고 58채널, 약 3만 개에 이르는 데이터를 기록하기 때문에 머리의 머리카락이나 몸에 털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홍석명 객원기자 hongsm@encar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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