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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차]신진 퍼블리카

조회수 2018. 6. 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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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에서 선발주자의 제품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경험은 제품의 생산 및 개발에 대한 노하우를 획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선발주자가 적게는 십 수년, 많게는 수십년에 걸쳐서 얻은 성과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는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남기고 간 군용 차량의 부속들을 주워 모아 만든 국제차량제작의 `시-발`을 시작으로 했다. 그 이후에는 자동차 산업의 선발주자인 서유럽이나 북미, 혹은 일본 등지의 자동차 기업들에서 이미 만들어진 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면서 발전을 이루며,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조립생산으로 만들어졌던 수많은 차들 중 하나가 바로 신진자동차의 ‘퍼블리카’다.


대한민국 모터리제이션의 불씨를 지핀 소형 승용차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재건을 이루며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산업화 사회로의 이행이 급속도로 전개되고 있었던 대한민국은 훗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 이에 다국적 기업들은 당시 아시아의 자동차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대한민국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미군이 방치하거나 현지 불하(拂下)한 군용 차량들을 재생/개조하는 방식으로 첫 걸음을 뗀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은 60년대를 전후하여 해외의 다국적 기업들이 대한민국 내의 산업계와 손을 잡으면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빠른 당시의 성장 기조에서 가장 돋보였던 대한민국 자동차 기업이 바로 신진자동차였다.


신진자동차는 1950년대, 부산에서 세운 ‘신진공업사’로부터 출발했다. 신진공업사는 미군으로부터 불하 받은 폐차된 군용 트럭(CCKW)의 차대를 재활용하여 버스를 제작하는 것으로 사업을 통해 사세를 키웠다. 이후 신진자동차는 박정희 정권의 4대 의혹 사건 중 하나인 새나라자동차 사건으로 인해 무너진 새나라자동차의 부평 공장(現 한국지엠 부평공장)을 1965년에 인수, 승용차 생산 기반을 획득하게 된다. 승용차 생산 기반을 획득한 신진자동차는 아시아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일본 토요타자동차(이하 토요타)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기에 이른다.


 
 

신진자동차는 토요타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1966년에 첫 승용차 모델 ‘코로나’를 출시하였다. 그 다음해인 1967년에는 최고급 세단 ‘크라운’과 함께, 코로나보다 더 작지만 보다 저렴한 가격의 소형 승용차를 내놓으며 승용차 시장을 빠른 속도로 장악했다. 이 차가 바로 ‘신진 퍼블리카’다.


 

신진 퍼블리카는 ‘토요타 퍼블리카(Toyota Publica)’를 라이센스 생산한 것으로, 20%정도의 국산화율을 맞추며 생산을 개시했다. 원본에 해당하는 토요타 퍼블리카는 오늘날 일본 경차 산업의 시발점이 되는 1950년대 일본 통산성(通商産業省, 現 일본 경제산업성)의 ‘국민차 구상’에 따라 개발된 차종 중 하나였다. 국민차 구상은 마치 독일의 국민차 계획에 가까운, ‘저렴한 가격과 높은 실용성을 양립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국민차 구상 자체에는 대다수의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저렴하면서도 실용성이 높은 대중적인 자동차는 자동차의 보급을 촉진하는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자동차 시장 전체의 성장을 일궈낼 동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자동차 업계에서는 이에 가까운 형태의 자동차의 개발이 속속들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토요타에서 만들어진 자동차가 바로 퍼블리카였다.


퍼블리카는 당시 토요타에서 생산하는 승용차 중 가장 작은 크기의 자동차였다. 차명인 퍼블리카는 ‘공공의, 대중의’를 의미하는 영단어 ‘Public’과 자동차를 의미하는 ‘Car’를 합쳐, ‘대중의 자동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토요타 퍼블리카는 이후 토요타 스탈렛(Starlet), 다이하츠 콘소르테(Consorte) 및 샤레이드(Charade), 그리고 오늘날의 토요타 비츠(Vitz, 수출명 야리스) 및 파소(Passo) 등으로 이어지는 토요타계 소형차 계보의 시조에 해당한다.


 

퍼블리카는 0.7~0.8리터의 배기량을 갖는 공랭식 수평대향 2기통 엔진을 사용했다. 본래는 전륜구동으로 개발하려고 했으나, 당시 토요타가 전륜구동 시스템의 개발 경험이 부족한 데다, 개발 기간의 부족으로 인해 전방엔진 후륜구동(FR) 방식의 자동차로 개발되었다. 변속기는 4단 수동 혹은 2단 자동변속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차체 크기는 3,580~3,620mm의 길이와 1,415mm의 차폭, 1,380mm의 높이를 가진 아담한 체구를 지녔다. 휠베이스는 2,130mm로, 오늘날의 일본 경차보다도 짧았다. 차체 형태는 2도어 세단형을 기본으로, 짐을 싣기 위한 픽업트럭 버전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공랭식 엔진을 채용한 탓에 경사로 등판 등, 부하가 크게 걸리는 주행 중에 일어나는 과열 문제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토요타는 국민차 구상에 따라 개발된 퍼블리카가 동사의 코로나와 함께, 일본 모터리제이션의 주역 중 하나로 활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저렴한 자동차를 목표로 만들어진 퍼블리카는 당시 일본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 당시만 해도 일본은 마치 7~80년대의 우리나라와 같이, 자동차 그 자체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자동차에 검소함보다는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더 요구했다. 5~60년대를 전후하여 토요타 크라운, 닛산 세드릭, 프린스 스카이라인 등의 고급 승용차들이 줄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반면, 신진자동차의 이름을 달고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퍼블리카는 당시 대한민국의 자동차 보급에 있어 일익을 담당했다. 운전하기 쉬운 작은 차체와 4명을 태울 수 있는 실용성, 그리고 국민차 구상에서 비롯된 간소한 구조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갖췄다. 당시 신진 퍼블리카의 가격은 최고급 세단 크라운의 절반 가격에 불과했다. 신진 퍼블리카의 저렴한 가격은 대한민국의 ‘마이카 시대’를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신진에서 생산한 퍼블리카는 퍼블리카의 2세대 모델에 해당하는 섀시코드 P20 계열의 모델이었으며, 1967년 11월 생산 개시 이래 1971년까지 총 2,005대가 생산되었다. 상용차를 포함하여 연 평균 생산량 2만대를 약간 넘었던 이 시기, 퍼블리카의 판매량은 결코 적지 않았다. 특유의 작은 차체와 그에 걸맞은 귀염성 있는 외형 덕분에 ‘꼬마 차’, ‘왕눈이 차’와 같은 친근한 애칭으로 불렸다.


신진자동차의 허리를 담당하고 있었던 신진 코로나와 함께 자동차 보급에 기여한 신진 퍼블리카의 생산은 1971년에 돌연 중단되고 말았다. 이는 60년대 말 벌어진 신진자동차의 재정 악화와 더불어, 중국 시장 진출을 저울질하고 있었던 토요타가 퍼블리카의 부품 공급을 끊으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 1974년,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가 한국 및 대만과 거래하는 기업의 중국 진출을 거부하는 외교적 협박이라 할 수 있는 ‘주4원칙’을 발표했다. 이에 중국 시장을 놓칠 수 없었던 토요타는 신진자동차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청산해버리면서 토요타의 라인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신진자동차의 생명줄을 최종적으로 끊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대한민국의 자동차 보급에 기여한 신진 퍼블리카는 현재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40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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